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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영토 The Land of Shadows

성다슬 개인전

9월 4일 - 10월 12일

첫 번째이자 두 번째의 토양에서: 달아나(지 않)는 이미지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도피의 공간이다. 실체의 견고함과 허약함 둘 다 잘 알고 있기에, 인간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시각적 허상에 매료되어 왔을지도 모른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그림, 사진 기술의 발명, 그리고 더 나아가 실시간 소통까지, 이미지는 실체를 도피시키는 공간이다. 우리는 사물을, 눈으로 본 장면을, 지금 현재의 감각을 이미지로/에 이주시킨다. 실체는 이때 유동적으로 변한다. 무거워서 쉽게 움직이지 않거나, 반대로 잡거나 쥐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한 것들이 인간의 손을 통해서 존재하게 된다. 찰나나 순간적인 것—감성적이고 비-시각적인 것과 견고하고 무게가 있는—원본성과 권위를 가진 것이 이미지로 떠나게 된다. 그러면서 양자는 어느 순간, 교차하기도 전환되기도 한다. 순간적인 것이 견고해지고, 무게가 있는 것이 순간적이 된다. 희미해지는 것을 확실히 포착하고, 견고한 대상은 자취나 그림자로 있게 된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이미지는 그 자체가 삶과 죽음의 순환 안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성다슬의 회화 작업 안에 불이 환하게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자세히 보면, 그 주변은 우거진 숲처럼 보이며, 동물들의 모습이 이곳에 발견된다. 떼 지어 어딘가로 달아나는 듯한 장면에서 동물들은 어디로 갈까? 이 위기의 이미지에서 그들은 사실 거기—회화 안에, 그림으로 있다. 동굴 벽화처럼 동물은 여기, 회화에 (아직/여전히) 있다. 인간의 모습도 가끔 보이는 화면에서 동물들은 위기를 직면한다. 불이 났거나, 폭설이 내리거나, 사냥꾼처럼 서 있는 인간이 등장하는 화면에서 동물들은 결말을 이미 다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자취로 (남아) 있다. 그림자나 잔상처럼 보이는 동물들은 주변 풍경은 물론, 색채와 붓 터치에 스며들듯 희미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형태가 미미하다고 해서, 동물들은 단순히 붓질이 지나간 흔적이나 동물을 재현한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동물들—이미지는 달아나지 않는다. 달아남에 머문다는 것은 소멸과 생성, 즉 죽음과 삶을 같이 껴안고 새겨-남는다=기록하는 것이다.

형태는 화면에 흐릿하고, 작가가 작품마다 설정한 서사나 시기, 그리고 공간 또한 불분명하다. 어쩌면 거의 닳아빠졌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회화 속 형상들은 질감과 표현 속에 흔적처럼 남는다. 우리는 달아나는 동물들을 볼 때, 그 이미지는 비극적이기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멸로도 향하지 않는다. 동굴 벽화에 새겨-남은=기록된 동물들처럼 성다슬의 이미지도 견뎌낸다. 이미지가 실체를 도피시킨다고 할 때,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삶과 죽음의 순환으로써의 이미지가 아닐까. 성다슬의 회화 공간이 (제목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토양”처럼 보인다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이 덮인 화면에(서) 펼쳐진다. 재난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위기의 이미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위기로써의 이미지는 죽음으로 몰아세울 뿐만 아니라 삶으로도 도피시킨다.

성다슬의 《그림자의 영토》는 허구나 가상으로 채워진 곳이 아니다. 이곳에서 이미지는—고대인이 횃불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을 뻗어 동굴에 자신의 손바닥 자국을 찍어 남기면서 나를 확인했던 것처럼 1 —첫 번째이자 동시에 두 번째 경험을 지시하고 보여준다. 달아나(지 않)는 이미지의 머무름은 “그림자의 영토”에서 공간은 물론, 시간 또한 만든다. 붓질과 장면에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인 동시에 거기에 있었다는 지표적 증거—자국, 흔적, 그림자로 남기게 될 때, 삶은 죽고 죽음은 살게 된다. 삶이 죽은 상태로, 죽음이 살고 있음으로 소생하는 구조가 스며들어 있을 때, 위기는 서사를 만든다. “내가 그때…”라는/라고 하는 과정을 동반하는 서사에서, 화자는 늘 나인 동시에 타자가 된다. 첫 번째인 나는 두 번째 내가 되어 나와 연루된 시작과 끝을 이야기한다. 이때 서사는 지난 것이자 여전히 있는, 펼칠 수 있는 이미지로부터 출발한다. 이 덮인 화면에서 동물들은 본인의 소멸을 견고히 이야기하며, 살아 있음을 흔적으로 새겨넣는다.

1 동굴 속 내=현전에 대해서는 다음 문헌을 참고. Marie-José Mondzain, Homo spectator, Paris : Bayard(2007), Jean-Luc Nancy, Les Muses, Galilée (1994)

서문 | 콘노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