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빈, 정지은 개인전
12월 22일 - 1월 27일
여기에 와 있는 모두 다
사람에게 무언가를 건넨다는 말은, 그 무언가에 무언가가 담겨 있다는 뜻이고 그 뜻 또한 내포되어 있다. 여기에 누군가가 보낸 물건이 있다—더 정확히 말하자면 ‘와’ 있다. 여기서 사물은 나에게, 우리에게 과거 완료형으로 도착한다. 이 물건이 간직하는 시간이 있(었)고, 장소가 있(었)고, 마음이 있(었)다. 그것들은 이미 과거, 가깝거나 먼 과거가 되었다.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도대체 누가 보냈는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어떤 추측보다도, 여기에 있다는 사실만큼 분명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뚫고, 그때 그곳을 간직하면서, 여기에 와 있다. 우리는 그 존재를 내부가 아니라 겉으로 먼저 보고 인식한다. 그 안에 시간, 장소, 마음을 그릇처럼 담는데, 이때 상자는 포장은 표면이지만 표면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단순히 겉치레가 아니다. 표면은 내부를 반영한다. 드러나 있는, 받는 사람 눈에 보이는 곳에서 표면과 내부의 시간은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있다. 포장과 상자는 내부로 향하는 연속적인 단계이지, 다른 차원에서 각각 따로 노는 것은 아니다.
평면 안에 공간이 생긴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여기에 물감이, 붓질이, 그리고 형상이 구체화된다. 우리는 정지은의 회화 작업을 마치 물건이 담긴 선물상자를 들여다보듯이 본다. 이 물건을 담은 평면은 입체 작업을 들고 가는 것과도 같은데, 그렇다고 입체가 단순히 회화의 부속물은 아니다. 마치 연극 무대의 주인공이 이름과 성격이 있는 것처럼, 그의 입체 작업 또한 무언가를 담는다. 어떤 경우에 평면—작가의, 혹은 누군가의—을 액자처럼 받쳐 주고 받아 주는, 어떤 경우에는 그 구조 안에서도 지지체와 대상이 서로 받쳐 주고 받아 주는 관계가 보인다. 그러고 다시 우리는 회화 안에 입체 작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안에 오브제가 있고, 구석에 또 다른 오브제가 있다. 작가에게 회화는 단순히 입체를 시각적으로 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회화라는 한 평면을 공간감을 가진 입체로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이미지가 여기에 온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분명하지 않더라도. 이수빈의 그림은 작가의 개인적인 서사가 담겨 있되, 시각적으로 받아 주는 우리에게 명료하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작가 본인이 될 수 없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근본적인 이유로, 회화는 서사와 이어질 수는 있으나 이를 곧이곧대로 옮기기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수빈의 그림은 잔상처럼, 형상보다 형태의 흐름이 더욱 강조된다. 어떤 것이 되고자 함은 회화나 입체 작업에서 특정 매체 사이의 서 있는 표시가 된다. 작가의 마음은 그림으로 옮겨져 와 평면에 머무른다. 그러면서도 곧바로 어딘가로 떠나기라도 하듯이 상을 남긴다. 붓질은 평면에 형태를 남기는 도구이자 다시 어딘가로 떠나는 잔상으로 나타난다. 어디로 떠날/떠났을까? 평면 너머에 있는 곳은 공간, 바로 작가가 한때, 그리고 지금도 서 있는 공간이다.
여기에 도착한 작품을 보는 사람은 여기에 도착한 우리이다. 여기에 있는 작품은 한때 작가의 작업실은 물론, 이들의 메모장 스케치, 머릿속, 그리고 생활 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른 생각이나, 생각에 미치지 않는, 순간적인 감각들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만나고, 물건을 만나고, 그러면서 재료를 가지고 평면과 입체, 이 둘을 아우른 작품이 여기에 와 있다.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보다 덜 분명한 판단의 뭉치들이 더 많다. 그 결과로써 우리는 지금, 작품을 보고 있다. 평면도, 공간도, 회화도 입체도 따로 노는 것도 아니다. 머릿속에 그려나간 공간이 평면에 옮겨지듯, 파편적으로 남긴 메모가 입체가 되듯, 두 작가에게 작품은 안과 밖이 이어져 있는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이전과 지금도 이어져 있다. 그때 한 생각이나 만들어놓은 이미지들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는 사이에 여기에 분명히 와 있다. 우리 역시, 그렇게 와 있다. 그리고 이어진다—작품에, 작가에게, 표면과 그 속에.
서문 | 콘노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