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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육아종

이연정 개인전

2월 6일 - 3월 16일

살에, 살아 있음에 머무르며

습기가 닿으면 윤기가 나고, 바람을 맞으면 거칠어진다. 몸의 가장 바깥에 있는 피부는 날씨나 주변 환경과의 접촉면이다. 나라는 주체가 외부와 다름을 감각하는 영역인 피부는 온몸에 퍼져 있다. 그것은 변화를 촉각적으로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표면이다. 동시에 피부는 내부를 향한다. 내 몸이 안 좋거나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징후처럼 피부에 이상이 나타난다. 대체로 발진의 증상으로 나오는 이상을 통해, 우리는 나를 둘러싼 관계를 재인식하게 된다. 이 이상은 외부에서 받은 영향일까? 아니면 내부에서 받은 영향일까? 이 질문에서 (앞서 꺼낸) 주체라는 말은 불안정해진다. 어떤 대상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그 환경 안에서 주체라는 확고한 입장은 불안정하게 설 수밖에 없다. ‘무언가’의 영향이 짐작되는, 분명한 흔적으로 남는 상처와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나 외부에서 받은 영향이 베일처럼 나를 에워싼다.

발진은 자기 자신을 낯섦으로 인식하는 출발점이 된다. 내 피부에 지금 일어나는 현상은 내가 유지해 온 (외부와 내부와의) 관계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딘가 어긋나게 된 결과로써 부각된 것이다. 바꿔 말해, 피부에 찍힌 수수께끼는 내 존재가 내-외적 관계 속에서 살아 있다는 표시이다. 나라는 존재가 내부와 외부의 관계에 에워싸여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표시를 통해, 우리는 피부라는 표면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살아 있다는 확신과 달리, 온몸에 ‘걸친/걸쳐 있는’ 피부는 기묘한 존재이다. 손동작을 따라 움직이고 칼에 베이면 피가 흘러내린다. 손을 대면 따스함이 느껴지고 세게 꼬집으면 아프다. 이렇게 생각할 때, 피부는 정작 감정이나 생리학적 현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살아 있다고 하기 어려운 껍데기처럼 보인다. 여기에 발진이라는 표시는 수동적인 상태에 (머물면서도) 생기를 부여한다. 외부에서 이상이 기입되거나 내부 이상에 의해 출현하는 발진은 피부를 무미건조한 껍질 대신 살아 있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회화가 무언가가 출현하는 공간이라면, 이연정의 회화 작업은 시각적 표현 즉 출현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 추측하도록 한다. 이연정의 회화를 볼 때, 시선은 (회화 평면에 나타난) 형상 너머의 것들을 향한다. 작가가 “어떻게 낡아버렸는지,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그것들을 이정표 삼아 추측할 뿐”이라고 설명하듯, 우리는 그 형상이 무엇인지, 어떤 연유로 그 형태가 되었는지/형태로 나오게 되었는지 추측한다. 그렇다고 작품은 출현의 원인을 밝혀 해명하거나 결과가 도출되는 구조를 도해하지 않는다. 그와 달리 외부와 내부의 접촉면으로 회화를 피부처럼 다룬다. 이연정의 회화 공간에서 인체와 사물의 형상이 겹치고 중복되고 다시 분리된다. 무늬는 새겨진 것이라기보다 찍히거나 쌓인 촉각적 흔적으로 표면에 남는다. 혹자는 이 무늬를 가지고 발진‘을’ 그렸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체의 일부를 시각적으로 재현하지 않았던 것처럼, 작가는 평면을 피부 삼아 회화 작업을 통한 발진을 보여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발진에 의해 비시각적으로 나타나는 타자를 회화로 몸소 담아 존재하도록 한다.

이연정의 회화 작업을 단순히 피부의 ‘시각적’ 유사성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면, 바로 피부가 애초에 비시각적 존재, 더 정확히 말하면 비시각적 타자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때 타자는 외부에서 오는 존재일 뿐만 아니다. 내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때, 자기 자신을 낯설게 받아들여 타자로 여기는 것 또한 해당한다. 그의 작업에서 회화라는 신체는 평면이었다가 (내부로 향하는) 깊이—공간적인 깊이와 전하고자 하는 주제나 내용을 알게 된다. 동시에 (외부에서 오는) 시선—유사성으로 묶이는 현실의 대상, 그리고 관람객의 해석—을 받는다. 그렇지만 내부의 영향을 그대로 드러나지도 외부의 영향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작품에 남는 형상은 어떤 징후로 가만히 있게 되면서도 천의 무미건조함에 살아 있음을 담는다. 우리는 발진 자체가 아니라 발진이 나타나는 살, 즉 살아 있는 신체로 그의 회화 작업을 바라본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았던 피부가 외부와 내부의 관계 속에 있고 나 또한 살아 있음을 느끼듯이, 평면과 형상은 작품 내부와 외부 사이에서 살아 있게 된다.

서문 | 콘노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