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현 개인전
12월 1일 - 12월 21일
소실점에 앞서 자연이 펼쳐진다면
자연은 본원적인 것이라는 특권에 절대성을 부여받는다. 인간이 자연과 관계를 맺을 때,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것으로서 자연을 동경한다. 그런데 이때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동경의 관계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경험뿐만 아니라 조망의 거리를 둔다. 자연에 빠져들어 가는 대신, 풍경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가까이/가까이서 맺는 관계가 아닌, 거리감을 전제로 한다. 경험의 장이냐 시각의 장이냐에 따라 자연과 인간은 거리감을 다르게 맺는다. 그렇다고 두 방식은 독립적으로 각각 작용한다고 할 수 없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한때 인상주의 화가가 대기를 그곳에서—그 장소에서, 그 캔버스에서—본인이 담으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눈 앞에 과거의 경험이 기억으로 펼쳐질 수도 있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이 관계 맺을 때 자연은 지금 현재라는 시간축의 영향을 받는다. 자연의 모습은 날씨 아래/속에서 변덕스러운 조건에 내맡겨질 수밖에 없다면, 기억 속에 잠기는 일에서 자연은 좀 더 확실한 형상을 이루다가 현재 보내는 삶에 의해 서서히 감춰진다. (그 말은 기억이 어렴풋한 성격을 애초에 갖고 있어서 동경하는 자연의 모습 또한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자연이 시각적으로 표현될 때는 자연과 인간의 맺어지지 않은 관계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경험적으로 그리거나 이상향으로 장면 삼는 경우, 표현 양상은 비-시각적이거나 굉장히 시각 재현적이다. 기상 조건 아래 우리가 장악할 수 없거나 장악하려고 거리를 두는 태도로 자연은 표현되어 거기에 있다. 시각적 표현 또한 인간 행위의 결과이기에, 자연과 관계할 때 경험이나 조망의 시각장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표상하는 행위를, 더 정확히 말해 표상하는 중인 행위를 목표로 한다면, 자연은 지금 생중계 중인(on air) 조건으로 인간을 포섭한다. 한편 표상을, 바꿔 말해 시각장에서 재현된 것을 목표로 한다면 자연은 장면이나 풍경으로 길들여져 그려진다. 시각 표현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지배권을 소유하느냐에 달려 있다.
김주현의 회화는 자연과 인간은 소유권을 나눠(/)갖는 표상 방식을 취한다. 그의 작업은 경험으로 다 덮이거나 조망의 태도로 장악하는 어느 한쪽으로 경도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쇄되지도 않는다. 작가가 몸소 담은, 한때 경험한 공간에서 신체(머릿속 기억, 시각, 후각 등등)로, 그리고 이 신체 중 손을 거쳐 회화 작업이라는 공간으로 옮겨진다. 여기서 작품은 작가가 있던 공간과 또-다른—다른, 그러나 또 하나의—공간이다. 회화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것은 몸소 담은 경험을 지금 다시 바라보고 옮긴, 여러 과정을 지나오면서 한 화면에 포개어 놓은 결과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어느 한쪽이 압도하거나 장악하는 것과 다른, 그 사이에서 관계 맺는 감각을 나누고 또 각자 갖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김주현의 작업에서 자연은 내맡겨진 조건의 반영(reflection)과 인간의 내성(reflection)을 아우른다. 그 결과로서 그림은 자연이나 내 마음을 표상하는 대신 그 사이에서 관계를 맺(으려)는 현재적 수행의 과정이자 결과로서 나타난다. 작가가 그린 자연의 모습은 한때 작가가 직접 보고 느낀 모습에서 시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 그 거리감을 제 손에 (다시금) 잡는 일—그 주체성이야말로 진리이고, 현실성이다. 작품에서 자연은 온 인류가, 그리고 더 좁은 범위로 말하면 우리 민족이 회귀하는 본원과 다르다. 개인적인 경험이 마주하여 그려진 자연은 공통분모로 수렴되지 않는다—그리하여 자연과 작가가 회화 평면에서 내쉬는 숨결로서, 우리에게 다가간다.
소실점을 미리 두고 구도를 잡지 않고 그려진 자연은 역사 앞에/선(先)-역사적으로 작가와 보는 사람을 세워놓는다. 미리 주어진 소실점으로 수렴되지 않고, 과거와 기억을 지금 여기에서 잡고 펼치는 일. 그런 의미에서 작가에게 동시대적인 것은 지금 눈 앞에 (이미) 펼쳐진 장면을 따라 그리는 일이 아니다. 작가 노트에 쓴 말 다음 문장은 이렇게 공명하기 시작한다—“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화면”은 그의 작업에서 과거와 기억을 가로지르면서 지금-여기에 태어난다. 가로지르기는 소실점처럼 이미 주어진 목적지를 소환하여 그리는 것과 다르다. 소실점 있는 역사가 이미 어떤 방향성을 상정한다면, 김주현의 그림은 경험하는 장인 지금-여기(now here)를 찾는다. 그곳은 어디에도 없는(nowhere),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곳으로서 기억과 지금의 감각이 한데 어우러진 시공간이다.
1 S. キルケゴール『キルケゴール著作集 第8巻 哲学的断片への結びとしての非学問的あとがき 中』, 白水社, 1969, p. 281 (쇠렌 키에르케고어, 『철학적 단편에 부치는 비학문적인 해설문』일역본)
서문 | 콘노 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