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하주 개인전
3월 14일 - 3월 25일
‘측면’을 ‘시도’하기: 열린 곳에서 공간을 전개하는 일에 대해서
네모 안에 네모가 있다. 그것은 너머의 네모, 너머를 향하는 네모이다. 벽이라는 네모 안에 있는 또 다른 네모는 잠정적으로 안과 밖 둘 다에 열려 있다—이것은 창문 또는 문. 이곳은 닫혀 있을 때도 너머를 향한다. 열면 어딘가, 지금 우리가 있는 곳과 다른 곳으로 연결되는 곳. 창문/문은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 또 다른 곳이 있음을 미리 알려준다. 이는 내가 안쪽 공간 안에 있을 때 이야기에 제한될까? 사방이 벽으로 제한된, 닫힌 곳에서 전개되는/될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까? 아니다. 밖에서도 우리는 창문/문을 통해 공간을 진입한다. 이때 내부 공간은 바깥 공간과 동일하지 않은 곳이다. 말하자면 내가 그 안에 있고 머물 때 비로소 공간이 된다. 그렇게 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문이나 창문의 존재를 알기에 그 너머에 펼치는 곳을 공간으로 인식하지 않을까. 부피만 느껴지는 덩어리—물질의 압도(적 존재)감은 우리의 발길을, 그 안에서 거닐면서 감각할 수 있는 경험을 미리—말 그대로—차단한다. 거꾸로 말하자면 창문/문이 있을 때면, 우리는 그 너머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너머를 몸소 오갈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한다. 비록 창문이나 문이 실제로 열려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 앞에 공간이 그려지며 전개된다.
창문/문은 공통적으로 공간과 다른 공간 사이에 있고 두 공간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둘에 차이가 있다면 창문은 공간적 구조에서 그 너머(에 보이는 풍경) 자체로 인식될 수 있는 한편, 문은 닫혀 있는 상태로 공간을 구분한다. 창문이 빛과 풍경을 밖에서 안으로 시각적으로 들인다면, 문은 사람의 신체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공간과 공간의 연속성을 나타낸다. 오하주의 회화와 제목을 보고 사람들이 혼돈을 느낀다면, 이러한 역할에 따른 차이뿐만 아니라 창문과 문이 화면 속에서 각각 특출하여 강조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 <하늘로 향한 창문>, <초록 문>, <너머의 문>처럼 창문/문은 작품 공간 안에 있는, 하나의 분명한 표현 대상으로 가리켜진다. 작품을 보면 하늘로 향한 문이나 초록색의 문, 보다 멀리 있는 문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화면 속—화면이라는 공간, 그 공간적 구조 안에서 제목에 등장한 창문/문은 물론, 창문이나 문이라는 공간적 요소마저도 독립적인 위치를 점하거나 위치를 독립적으로 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화면 속에서 다른 공간적 구성 요소와 동등한 하나의 파트/부분에 더 가깝다. 파트/부분이란 말이 어떤 전체를 미리 전제한다면, 여기서는 어떤 파트/부분이라 할 수 있을까? 이때 파트란 전체상의 기능에 따른 세부 역할보다는 시각적인 구성의 하나이며 동등한 요소들로 간주된다. 보는 사람의 시점에서 잡힌 구도가 아닌, 작품이라는 전체 공간의 색면, 형태, 선과 같은 파트/일부라 할 수 있다.
작품이라는 공간에서 벽과 창문/문의 구별뿐만 아니라, 평면과 공간적 깊이, 부피감과 색면의 구분 또한 한 측면으로 표현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창문이나 문의 시각적인 표현이나 이른바 추상화된 표현에 그치지도 않고 작품 제목을 부적절하게 달았다고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오히려 창문/문의 기능, 바로 격리와 연결을 공간 안에서 전개하는 이접성(離接性)을 내재한다. 작품이라는 공간—작가가 그린 공간적 구조 안에서 창문/문은 여러 색과 형태의 어떤 하나로 존재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한 ‘측면(測/側面)’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말하는 ‘측’이란 어떤 대상의 일부분(옆側)을 가리키는 동시에 공간에서 측정(測量)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공간을 구획하고 대상의 일부를 통해서 담아낸 곳은 물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설계도나 도면처럼 평면상에 이차원적으로 그려진다. 파트/일부가 조합된 작품은 착시적인 성격에 의해 혼란스러움이 배가한다. 작품 속에서 공간적 구조가 어느 쪽이 외부/내부로 튀어나왔는지 헷갈리는 데서 오는 이 감각은 면에/을 통해서 공간을 전개하여/되어 간다. 색면과 선은 작품이라는 평면 공간에서 조합되어 삼차원적 공간 구조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캔버스 평면을 측량, 즉 구획하면서 이차원(벽)과 삼차원(부피)을 열어 젖는 공간으로 자리하도록 한다. 창문/문은 공간을 이어주는 통로인데 그것은 실내에만 마련되어 있지도 바깥에만 달려 있지도 않은, 내부와 외부에 모두 열려 있는 곳이다. 이러한 성격을 작품이라는 공간에서 시도하여 보여주는 것, 그것은 투사에 따른 공간적 재현만 가지고 할 수 없으며 작품이라는 창문/문으로서 비로소 수행된다.
작가가 화면에서 시도한 결과는 제작이라는 이름의 측량 과정과 그 결과인 옆모습 즉 대상의 일부분을 포함한 것이다. 문과 창문은 어떤 공간으로 연결되는 통로이기 전에, 면으로서/면을 통해서 공간을 안과 밖, 이차원과 삼차원, 평면과 부피감을 구획한다. 작가가 제목에서 가리키는 문과 창문은 작품 속에서 또 다른 곳으로 바로 연결하는 장치가 아니라 그것들이 지닌 ‘측면’의 성격을 작품이라는 공간 즉 화면에 가지고 온다. 네모/면의 일부분에 선을 그어, 또 다른 네모/면을 표시하고 외부(실외)를 내부(실내)로 끌어들이는, 혹은 반대의 경우도 일어나는 ‘시도(試圖)’로서 작가는 문과 창문이 공간—안과 밖이라는 양쪽 공간을 분리하고 또 이어주는—에서 갖는 이접의 성격을 다룬다. 여기서 ‘시도’라는 단어는 한자의 試(시)와 圖(도)가 합친 단어이다. 계획하거나 그리는 것(圖)을 해 보는 것(試)—그런 의미의 ‘시도’가 이뤄진 공간이 곧 그의 작품이다. 어떤 풍경이 내부와 외부에서 각각 보이도록 사전적으로 구획하거나 잠시 닫아놓는 대신, 외부와 내부를 잇기. 그것이 작품 화면이라는 공간에서 이뤄진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작가에게 ‘측면’을 ‘시도’하는 일은 설계도나 도면을 그리는 것과 벽의 두께를 옆에서 보는 두 방향, 아니 두 차원 사이를 오가는 태도로서 작품에 반영된다. 그때 내부와 외부, 이차원적 평면과 삼차원적 공간은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상호적으로 열려 있다. 바깥/내부가 내부/바깥이 될 수도 있고 부피가 생기거나/생기면서 동시에 평면에 머물기도 한다. 그처럼 공간이 전개되는 평면을/으로서 작가는 시도한다.
서문 | 콘노 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