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구, 조을 2인전
10월 19일 - 10월 24일
깨진 유리잔을 다시 조립하듯이
(다시) 새겨 넣기 깨진 유리잔을 (불완전하게) 다시 조립하듯이, 단편들을 하나씩 화면 안에 담는다. 그것은 온전한 전체상으로 복원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경험한 일을 형태로 담고자 하는 경험의 한 형태이다. 화면 안에 담기는 단편—조각들, 부분들, 파편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시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인 경험을 통해서 (다시) 구축해 나가려는 태도가 아닐까. 말 그대로 이것이 ‘태도’라면, 그것은 화면에 (꼭) 드러나야만 하는 것일까? 다시 조립한 유리잔은 완전하지 않고 그 형상에, 그 상태에 틈새를 가진다. 이 틈새에서 펼쳐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경험일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면, 경험은 틈새에서 출발한다. 온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험을 파악하거나 장악하려고 한다. 이지구와 조을의 작품을 보면 여러 개 선이 교차하고, 여러 형태가 화면에 포개어진다. 붓질보다 두께를 입체적으로 더 담은 화면은 경험을 (다시) 새겨 넣으려는 태도가 담긴다.
경험(하기)의 접촉면 이지구는 인조가죽을 비롯한 원단을 재료로 형상을 만든다. 패션을 전공한 작가에게 옷은 표현의 매체보다는, 트렌드를 따르거나 옷을 만들기 위해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는 것으로 다가왔다. 이런 고민에서 출발하면서 작가는 사회와 개인 간의 관계를 시각 작업으로 다루게 되었다. 재봉틀로 바느질하여 만든 형상들은 한 화면에 배치되고 겹치면서 형상과 배경, 심지어 형상들끼리도 넘나든다. 부분적으로 안에 솜을 넣거나 다른 원단을 사용할 때, 작품 화면 안에 재료마다 다른 질감과 형태가 실을 통해서 연결된다. 이지구의 작업에서 실은 구별과 연결 역할을 동시에 해 준다. 바탕과 형상, 원단과 원단, 겉과 속을 만들고 또 이어 주는 실은 수행적이고 상호 침투하는 경험이 된다. 말하자면 펼쳐지는 화면은 트렌드의 반영을 벗어나서 사회와의 접촉면을 가진 한 개인의 피부가 된다.
조을은 기억에 남는 장면을 화면에 구성한다. 합판을 잘라서 만든 단편이 조합된 화면은 잊지 않기 위한 태도에서 출발하여 온 것이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기록과 달리, 작가는 단색조의 단편들을 화면에 추상적으로 담는다. 제목이 가리키는 시간은 가깝거나 이미 멀어진 과거이다. 이를 다시 화면으로 가지고 올 때, 추상적인 이미지는 작가만의 시선으로 풀이되어 배치된다. 그려진 내용보다는 형태의 윤곽이 묵묵히 두드러지는 화면은 단편 하나하나가 가진 내력과도 다르다. 작가는 그때 기억을 더듬어가듯이 형태들을 화면 안에 담는다. 시각적 재현으로 드러내는 대신 물성의 묵직한 배치 안에 조을은 본인의 기억을 담는, 즉 간직하고자 한다.
틈새와 이음매 만들기 실로 꿰매어지고 컷팅된 형상들은 화면 안에 이음매를 만든다. 조을의 화면에서 사이사이에 비어 있는 바탕이 틈새라는 비유로 기능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지구의 화면에서 솜이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않은 표면이 이음매라는 비유로 기능하지 않는다. 두 작가에게 작품 화면 자체가 틈새이나 이음매인데, 작품은 이 추상적 형태 안에 경험을 함축하고 또 펼칠 수 있음을 확보한다. 궁극적으로 두 작가에게 화면이란 정해진—제약적인 공간에서 펼칠 수 있음을 허락해 주는 곳이다. 이지구는 사회 속에서 개인을 다시 만나, 이를 출발점 삼아 외부와 내부의 침투를 보여준다. 조을은 쌓인 시간 안에서 떠오른 기억을 다시 만나, 이를 출발점 삼아 물질과 이미지를 오간다. 틈새와 이음매로써의 화면은 본인과 사회, 과거와의 접촉면을 가진다. 그러면서 화면 너머 혹은 배후의 시공간을 인식하게 해 준다. 더 넓은 사회, 멀어진 과거는 그때 비로소 선명하게 작가에게, 그리고 보는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서문 | 콘노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