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훈 개인전
2월 14일 - 3월 11일
감소할 시각으로 우리가 보는 것—그때나 지금이나 세계가 충만하다면
아마도, 지금 시대에 우리가 흑백 사진을 보고 아련함을 감각한다면, 그 장면이 지난 어느 세기에 있었던 일이라고 인식하는 데서 유래하지 않는다. 몇 년 몇 월 며칠에 일어났다고 분명히 파악하고 지금 현재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안다고 해서, 아니 오히려 안다고 하면 아련함은 뿜어나오지 않는다—분명히 파악된 이상. 그렇다고 기술이 그 당시의 최상, 바꿔 말해 최대한의 결과라는 (오늘날에서 본) 한계를 가졌다고 판단하는 데서 아련함은 유래하지 않는다. 오늘날에 이토록 선명하게 세계가 비치는데, 그 당시는 세계를 제대로 보고 기록하지 못했다고 하면 오늘날 스마트폰의 필터 효과로 ‘만들어진’ 흑백 사진을 보고 어떤 말을 할까—“기술은 늘 전진한다.” 아련함은 오히려 시각적인 차원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각적 차원이란 명확한 시각, 그 확고한 시각으로 본 특정한 대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것이 어느 누구나 어떤 것이라고 식별하고 판단하는 결과가 아니라 아련함은 시각적 감소를 통해 획득된다. 우리가 보는 세계가 색깔로 충만하고 지금 제 눈으로 볼 수 있다면, 흑백 사진은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이 감소한 결과이다. 그때라는 시간, 그곳이라는 장소, 보는 대상, 그 크기와 같은 시공간과 경험의 결별은 물론이지만, 그 어떤 요소보다 앞서 색깔이 감소한 인식에서 우리는 아련함을 느낀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그리스 성당에 있던 석고상을 고귀함이나 신성함으로 보는 대신 아련함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석고상도 색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세계는 흑백이 아니었고, 그리스 신전은 화려한 색을 띠었고 우리는 그때로 돌아가자는 의견에 공감도 어느 정도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색은 자연스러울 정도로 온 세계를 덮는다. 한때 있었던 색을 복원을 하자는 의견은 지금 세계에도 여전히 색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처음의 상태로 복원을 하자는 주장 대신, 여기서는 감소한 세계를 보는 태도를 강조하고 싶다. 흑백 사진과 석고상이 그렇듯이, 흑백은 색의 감소한 결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색의 감소는 본래 우리가 보던 세계에서 멀어진 채 지금 여기에 존재를 머물도록 한다. 그것은 색을 세계에—그때나 지금이나—두고 온 결과이다. 이는 세계를 구성하는 음과 양과 같은 대립적인 질서나 흑백 논리와도 다르다. 구성된 질서라는 세계나 그 속의 명확한 위치로 수렴되는 대신, 흑백은 세계의 잔여(물)로 우리를 아련함으로 데리고 간다. 그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흑과 백의 공간을 바라본 우리 시선에서 유래한다.
김덕훈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소나무, 장미, 한 사람, 여러 인물은 정물처럼 보이지만 그 전통, 말하자면 언어적 의미와 알레고리로 대상을 묶어두지 않는다. 흑백의 표면 위에 세워지는 사물과 언어의 연결이 아니라 작품은 지금과 지나간 과거 둘 다를 담는다. 표정마저 딱딱한 인물 표정과 그 형체를 오래 유지할 것 같은 꽃과 잎사귀는 생기(生氣)와 동떨어져 있다. 단단한 것이 아니라 단단해 보이는, 한순간의 단단함이다. 알갱이같이, 모래알처럼, 그 미세한 입자는 단단한 형상을 이미지로 하얀 평면에 묶어둔다. 서예나 추상표현주의에서 강조되는 흑백의 대비나 붓질의 강력함이 평면에 획을 그어 생기를 발하고 세계를 열어 젓는 것과 달리, 김덕훈의 작업은 세계의 잔여물을 다시 그러모으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인물이나 장미는 하나의 형상이다. 하지만 곧 미세한 입자로 흩어질지도 모르는,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러모으는 손은 세계를 질서로 구성하거나 기술로 복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입자라는 미세함에 담은 아련함을 잠시 하얀 평면에 배치하여 보여준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형상이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 보게 될 미세함과 섬세함은 곧 이 대상, 그 형상을 확실히 보여주고 구성하는 대상이 언제 다시 입자로 돌아갈지 모르는 데에 근거한다—그때, 아련함은 거기서 뿜어져 나온다.
그의 작품은 흑백의 미세한 표현을 통해 아련함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인생무상이라는 의미로 묶여 표현되는(=바니타스) 전통 정물보다 한층 더 밀고 나간다—어디로? 과거를/에서 지금으로. 한때 있던 어떤 조각상이나 어딘가에 있던 꽃이라는 대상을 보여주는 대신, 작가는 과거 자체 즉 시간의 지나감을 대상 삼아 지금이라는 세계 속에 형상을 그리고 세워둔다. 그것은 지나간 대상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서 서서히 사라질, 즉 시간적 경과로 향한다는 의미에서 지나가는 대상이다. 작가가 인물이나 식물을 그릴 때, 그 대상이 갖는 의미—알레고리나 맥락—라는 역사 속 위치와 연결하면서 아련함을 자아내지 않는다. 이 아련함은 대상이 한때 담던 시공간이 아니라 흑백의 세밀한 회화라는, 순수하게 매체적이고 표현의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얻는 감각이다. 그의 작품이 고대 조각이나 건물 벽화나 흑백 사진에 걸쳐 다양한 소재로 보이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런 소재가 지닌 색의 감소라는 특징을 작품에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소재들이 가진 단단한 물질성이 아련함을 발하는 것과 달리, 그의 작품은 상(像)으로 머문다. 머묾의 자리에서 단단해 보이는 것은 그 시각성에 아련함을 포개어 놓는다.
시간이 지나도 남는 과거와 달리, 작품은 미세한 입자로 세워져 있다. 사진이나 조각 같은 기록은 과거를 그 형태로/에 남긴다. 서예나 페인팅이 평면에 붓질이라는 흔적으로/에 (여전하도록) 생기를 담는다면, 김덕훈의 작업은 생기를 현현하거나 언어의 사슬로 묶어두지 않는다. 작품은 아련함을 과거/지나간 일의 특정 형상에 찾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거를 평면 전면(全面・前面)에 내세우지 않는다. 그렇게 등장했을 바에는 과거는 현재에 통합되고 만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과거를 초월하여 지금 바로 있는 것이라고 하듯이. 대신 작품은 미세한 입자로 그 형상들을 잠시 세워둔다. 언제 다시 흩어질지도 모르는, 그 표현에 시각의 감소를 직면하도록 한다. 흑백의 미세함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작품에 지나가는 과거를 보게 된다. 여기서 흑백은 세계의 잔여(물)일까? 그렇다. 하지만 세계의 어떤 잔여(물)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 자체의 잔여(물)이다. 궁극적으로 흑백의 미세함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감소할 시간성이다.
서문 | 콘노 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