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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빈자리를 쥐고

이승연, 이코즈 2인전

10월 17일 - 11월 18일

기록에도 기억에도 주인이 있다—증인이 아닌, 주인이

문득 떠오르는 것은 한때, 또는 지금까지, 혹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 아닐까. 떠오르는 것은 사실이냐 허구냐를, 물체냐 환영이냐를—말 그대로—떠나서, 우리를 향하고 우리는 이를 맞이한다. 기억은 해수면에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하는 부유물, 기록은 바닷가에 어떤 이유로(든) 떠밀려 온 표류물이다. 여기서 주인은 누구일까. 나 자신이나 타인의 낯섦을 만나 소유하는 것, 그것이 기억과 기록의 공통점이다. 떠오르는 것, 그것은 부유물이나 표류물처럼 움직이던 것들을 내가 움켜쥠으로써 획득하는/되는 것이다. 내 시선이 고정되거나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일에서 사실이냐 허구냐 또는 물체냐 환영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는 움켜쥔다는 행위가 핵심이다. 기억과 기록은 내가 주인이 되는 일을 통해서/에 의해서 획득한다/된다.

떠오르는 것은 곧 움켜쥐는 것이다. 이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 바로 목소리로 나온 한마디이다. “아” 하는 순간, 목소리는 말 그대로 한 ‘마디’ 즉 이음새가 된다. 무언가가 해수면 위에, 무언가가 바닷가에 있는 그 모습을 볼 때,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우리는 관심이 끌린다. 나와 내가 아닌 것/타자, 사실과 허구, 그리고 물체와 환영 사이에 비집고 들어와 관계하는 것이 목소리이다. 목소리는 발화와 다르다. 그것은 언젠가 그곳에 있던 존재의, 존재들의 사이에 들어서게 된 순간적인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의 윤곽이 잠시 드리워지는 질감 같은 것이 목소리다. 목소리는 주장과도 다르다. 그것은 설득력을 가진 구성이 아니라 어렴풋하고 덧없는, 그럼에도 어떤 존재를 간직한다. 이곳—기억과 기록이 자리하는 곳에 존재 또한 담기(게 된)다.

목소리는 가장 내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나라는 주체에서 떨어진 곳에 있다. 떠오르는 것에 주도권의 절반이 넘겨지기 때문이다. 지속적이거나 순간적으로 내 관심을 끄는 힘은 상대에서 온다. 그런데 목소리, 그 한마디에 의한/를 통한 관계 맺음은 금방 자취를 감춘다. 이런 소멸을 이미 잘 알고 있기에 애써 남으려고/남기려고 하고 혹은 이러한 감소와 소거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여운을 형태로 만들고 그것에 담고자 했다. 단편적이고 불분명한 것들을 강박적으로 끌어올리거나 지어내는 일과도 같지만, 그럼에도 남기고자 했다. 이승연과 이코즈에게 기억과 기록은 작품이라는 또 다른 항목과 함께 관계 맺는다. 두 작가에게 작품은 기록된 기존의/기성의 것이 아니라 기록하기라는 행위의 결과이다. 이승연에게 기억은 주변 사물이나 풍경 속에 (다른) 존재를 부각하는 동력이 된다. 어린 시절에 겪은 상실의 경험은 사물이나 풍경 속에 존재(감)를 감지하여 그려내는 일이 된다. 작업 과정에서 작가는 흑연을 만지고 양감을 종이와 입체로/에 창출하는데, 그것은 작가의 눈에 어렴풋이 보이던 이미지를 제 손으로 형태를 만드는 동시에 존재로 가시화하는 일이다. 한편 이코즈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꿈에 여러 번 등장한 장면을 각각 기억과 기록으로 기술한 뒤, 중복되는 소재를 소거하여 남은 것들을 그림이라는 형태로 기록한다. 작가에게 기억은 어린 시절의 이미지와 꿈에서 본 허구적 이미지 사이에서 출발한다. 그의 작품은 귀속감이 강한 향수와 다른 결과물로 나온다. 기억에서 기록을 뺀 결과, 그의 작품은 기억에서 유래한 강화된 픽션이 되어 나타난다.

두 작가에게 기록은 단순히 내가 자신의 기억이나 관심을 가진 주제를 움켜쥐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꿈에서 남은 것과 실제에서 탄생한 환영을 포착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움켜쥐는, 곧 존재하(게 하)는 일이다. 끈질기게 남은, 주제로 잡힐 만한 것 대신 가장 희미하고 진실에서 먼 것들을 형태로 담기. 실체를 확실히 가진 것들 대신 순간적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어쩌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은 것들을 실체로 만들기. 이승연과 이코즈가 형태로/에 담고자 한 것들은 기록의 주장이나 이야깃거리가 아닌, 그것에서 물러선, 말 그대로 말도 안 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를 진실에 대립하는 허구나 실체 아닌 환영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에 작가의 목소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정작 그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나, 혹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쉽게 나눠지는 것이었을까. 내가 그/그것을 소환하는 과정에서 소리는 퍼졌다—나와 그 대상 사이에. 순간적이거나 확실하게 남지 않은 것을 작품으로 옮기는 일은 낯섦을 소거하는 대신 내가 껴안는 태도이다. 낯섦을 맞닥뜨렸을 때, 그것은 오히려 기억과 기록, 사실과 허구, 환영과 물체 모두에 가장 가까이 있게 된다. 여기에는 증인이 아니라 주인이 있다. 증인이 아닌 주인은 나나 내가 아닌 것에 문득 떠오르는 것을/으로 시선을 가지게 된다. 이승연과 이코즈가 낯섦을 받아들이는 시선은 우리에게 작품을 통해서 기록에, 또는 기억에 주인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문 | 콘노 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