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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삭 부서진 비눗방울

고요섭, 이영수 2인전

9월 10일 - 10월 14일

등을 돌린 회화: 심연과 침묵—신념을 담은 외면에서

바깥의 반대는 안이고, 안의 반대는 바깥이다. 의문의 여지 없는, 당연한 이 전제에서 출발할 때, ‘외면하다’라는 동사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바깥을 보는 방향이 내면과 상반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한자 외外는 바깥을 향해서, 한자 내内는 안을 향해 본다고 이해하면, 양자는 각기 다른 방향을 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외면한다는 표현은 다른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는 한자 그대로 이해되는 것과 달리, 오히려 내면에 충실한 태도에서 나온다. 등을 돌린다고 하지만 외면이란 마음속에서 내가 틀림없이 맞다고 믿고, 다른 길로 가기를 결단한 태도로 나온 것이다. 외면이라는 말을 두고 혹자는 외관과 무엇이 다르냐고 물어볼 것이다. 외관은 내부와 단절된 관계를 가진다. 내부가 외관을 따른다고 해도 여기에는 결단의 비틂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 비틂이 있기에 외면은 외관이라는 단어와 달리 동사가 된다. 외면하기란 바깥으로=외면으로 이어져 있지만, 그 중간에서 한 번 방향을 크게 틀어서 자신의 믿음을 끌고 가는 것이다. 그만큼 자기 자신과 가까이 있는 상태인 외면은 내면을 똑바로 본 결과가 등을 돌려 똑바로 보지 않는 태도로 이어진다.

회화 작업이 외면한다면 그것은 작가에게 등을 돌리는 것일까? 작가를 더는 존중해 주지 않고, 작가의 의도를 배반한 결과일까? 앞서 말한 대로 내면의 충실함을 가지고 다른 쪽에 시선을 보내는 것이 외면이면, 회화 작업에서 외면이란 보는 사람에게 시선을 먼저 던지는 결의의 결과이며, 이를 출발점 삼아 보는 사람은 작가의 내면을 이해하고자 다가간다. 힘의 방향을 중간에 크게 바꾸면서도 회화는 작가 내면의 충실함을 바깥인 화면을 향해 보여준다. 여기서 내면은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방향을 틀면서 밖으로 나온다. 말하자면 재현 방법이 안=내면/밖=화면 사이에 개입된다. 이때 내면을 그대로 따라 밖으로 나올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회화 정면을 외면 삼는다. 그것을 작가의 내면 그대로, 내면 그 자체 아니냐고 회화 작업에 물어본다면, 회화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때 외면—바깥 면, 그리고 등을 돌리는 태도—은 질문을 부정하는 대답만큼 내면에 신념을 가진다. 내면의 신념은 다른 길을 기꺼이 선택하면서 나아간다. 우리가 보는 것은 방향을 크게 전환한 결과이기에 회화 작품을 보는 그대로 작가의 내면을 단번에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선을 보내고 작가의 내면에 물음을 던질 수 있다=내면을 물어볼 수 있다.

이영수와 고요섭의 작품에서 회화의 외면은 기꺼이 받아들이는 내면에서 나와서 보는 사람을 향한다. 이영수의 작품에서 마음속으로 침잠하는 듯한 회화 평면은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깊고, 고요섭의 작품에서 인간의 모습은 사실적으로 그려졌지만 표정에 감춰진 깊이는 알 수가 없는 채 거기에 있다. 겉으로 드러난 표현도 그려진 대상도 작가마다 다르지만, 작가의 내면을 그대로 묘사하고 재현하는 대신 알 수 없음을 회화 정면으로 가지고 온 것이 공통점이다. 알 수 없음은 곧 몰라도 된다는 식으로 종종 오해받지만, 실제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두 작가의 회화 작업은 작가상의 자아나 심리 상태로 접근하지 못하는 채 거기에 남아 있게 됨과 동시에 관람객의 시선을 계속 받는다. 여기에 보는 사람이 이들의 회화에 빠져들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면, 동일시하기 쉬운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작품에 나오는 인간의 모습이나 대형 화면에 펼쳐진 심연처럼 우리—작품과 보는 사람 모두 알 수 없는 삶을 산다고 하듯 말이다. 작품과 보는 사람이, 심지어 작가마저도, 이 모두가 알 수 없는 궁지로 빠지는 절대적 외면 상태와 달리, 이영수와 고요섭의 회화 표면은 그 안을 향해 시선을 유발한다. 속마음이나 느낌을 그대로 담거나 묘사하는 대신, 그렇다고 알 수 없음으로 얼버무리지 않은 회화 작품의 외면적 성격이 있다.

두 작가의 회화에서 외면적 성격은 외관 또는 외견상에 머물지 않는다. 고요섭이 몸짓과 표정에 주목하고 이영수의 작품이 추상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안에 (들어) 있는 것과 별개가 아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호하면서 끌고 나오면서 방향을 바꾼 태도라 할 수 있다. 회화 작업이라는 외면을 먼저 보는 우리는 내면의 결단을, 그 방향 조정의 계기와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 결과, 거기에 있는 작품에 진심을 들여다본다. 바로 그렇게 보는 사람 또한 시선을 보낼 때, 외면은 비로소 이해받기 시작한다. 외면 즉 등을 돌린다고 하지만 결국, 회화에서 등은 작가의 내면뿐만 아니라 함께 보는 사람의 시선을 허락하는 화면이다. 결과부터 시작했지만, 그 이유도 잘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회화의 침묵과 심연에 알 수 없음 대신 신념으로 이해한다

서문 | 콘노 유키